*1차 미각미술 전시회 에르미타쥬전의 시연 전시 모습입니다.
Taste my Art : True Nature : 미(美)술과 미(味)술 : 본질 |
형상 너머에 대하여: 미각미술 '더 초'가 형상과 형상 너머를 잇는 다리가 되다.
The Cho proto type 1-2
"미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불변의 진리, 참된 사랑, 자연의 섭리, 모든 본질적인 것은 형상 너머에 있다.
자연의 이치를 성찰해 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다.
눈을 보고 나는 완연한 겨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성찰해보면 무언가 본질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겨울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겨울의 형상과 현상, 눈, 얼음 등은 겨울의 본질이 아니다.
겨울의 표현이다.
눈 없이도 겨울은 있다.
겨울의 본질은 형상이 없다.
하지만 그 실체로 인해 겨울로 표현되는 수 많은 형상을 나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이치와 섭리 다 마찬가지이다.
형상은 마음의 형상도 포함한다.
생각하는 마음의 형상 너머에는 우리의 본성이 자리한다.
참사랑이 가능한 이유다.
참사랑은 이유가 없다.
부모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떠올려보라.
굳이 열거한다면 얼마든지 부모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를 분석하거나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을,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참된 이유는 내 생각이 분석해낸 이유, 그것들 때문이 아니다.
참 사랑은 이유도 조건도 없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하는 걸까?
감동적인 그림,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 마음을 울리는 참된 사랑을 목격할 때 어떤 이유로 우리는 감동할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을 깊이 성찰해 본다면 아름다움은 궁극에 가서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형상 너머의 우리의 본성이고 아름다움은 우리의 본성을 깨운다.
궁극의 본질에는 이유나 설명이 필요 없다.
미술의 본질도 종국에 가서는 사랑과 진리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참사랑은 조건이나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술도, 사랑도, 진리도, 궁극에 이르러서는 상대적 관념과 생각 너머의 우리의 본성을 깨우고 우리를 형상 너머의 본질로 인도해준다.
설명도 이유도 필요 없는 존재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 곳으로.
불의의 사고를 겪은 작가는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위한 식생활과 건강 회복을 위한 절박한 미각 체험을 통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맛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고, 재발견한 맛의 다차원적 측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도 없이 시도했으나 아무리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한다.
“제가 표현하려던 맛의 다차원적인 측면, 적멸의 맛, 형상 너머의 맛, 나의 에고를 넘어선 몰아의 순간에 발견한 순수의식으로 느끼는 맛, 그 존재적 본질의 극의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맛을 미술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완벽한 방법은 맛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형상을 초월하는 트랜스아트의 의미가 무색하게 형상에만 얽매여 있던 제 의식이 해답을 각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신 직접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했고,
이것이야 말로 제가 시도한 형식을 초월하는 트랜스아트의 본질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트랜스아트는 형식을 초월해 형상 너머의 본질을 표현하는 미술이며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접근입니다.”
그는 오히려 맛이라는 솔직한 매개체를 통해 트랜스아트에 재미(FUN)라는 요소가 스며들어
명쾌하게 작가가 원하던 궁극의 맛을 미술로 표현할 수 있었으며
일상에서 자각하지 못하는 일기일회의 진리를 말해줄 수 있는 미술,
이보다 더 트랜스아트적일 수 없는 미술을 창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게는 큰 의미를 가진 아트 디바이스 ‘더 초’를 사용해 깨달음과 무아의 경지가 꼭 고행을 동반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궁극의 미각 체험을 소개해 드리며 맛의 견성을 직접 체현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벗어날 때 생각이 잦아드는 고요한 평화 속 적멸의 순간,
완전한 몰입 속에 무아의 경지,
내 본래의 존재상태에서 깨닫는 견성,
마음이 멈출 때 드러나는 내 본성,
생각에서 벗어날 때 느낄 수 있는 무한성과 지금 이 순간에 내재된 아름다움,
이 모두 본질을 찾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기 위해 추구하던 것은 그 순간이 아닐까요?
미각체험으로 무아의 경지를 달성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도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의식의 구조가 환골탈태 할 수는 없겠으나
맛의 체험으로 적멸의 순간을 통해 내 본성을 잠시나마 엿보는 '견성의 체험'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영혼이 지쳐 힘을 잃고 지쳐있을 때 어머님이 차려 주신 밥상의 따끈한 국물이
여러분의 지친 마음을 녹이고 얼을 울린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번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맛있고 충만한 본질적인 느낌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진솔한 무언가가 마음의 자리를 대신하는 적멸의 순간.
이미 여러분은 수도 없이 그러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에 의해 그 순간의 경이로움이 찰나에 감춰졌을지언정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맛을 본다’는 말의 어원에는 이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각뿐 아니라 미각 또한 마음 너머의 근원적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사실은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자각한
몰입된 의식의 상태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전념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한다면 말입니다.”
The Cho proto type 3-2
미술을 맛보다: Taste my Art |
‘맛보다’ Tasting is Seeing
맛을 본다는 표현에는 이미 미각과 시각이 합쳐져 있습니다.
왜 작가는 보는 것이 아닌 먹는 것을 미술이라 표현할까요?
"미 美와 미 味가 합쳐졌을 뿐 제가 표현하는 본질과 표현하는 방식은 같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 미술은 본질에 가 닿는 매개체이자 문이고 열쇠이며 '더 초'는 작가의 이데아를 칠하는 붓입니다.
작가는 맛이라는 색감을 사용해 작가가 느낀 본질적 미-(미술의 미와 미각의 미)-실존적 아름다움과 존재의 기쁨, 삶의 본질적 요소들을 미각미술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이라는 캔바스에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저 관객이 아니며 오직 그들만이 마음의 캔바스를 통해 트랜스 아티스트와 하나되어 작품을 함께 완성하는 동일한 트랜스 아티스트인 것입니다.
TRANS-PERCEPTION BY TASTING 이번에 작가가 사용하는 붓은 '더 초'이며 캔바스는 관객의 마음이다.
자연이 펼쳐놓은 같은 하늘도 그를 인식한 각자의 의식의 차원에 따라 달라지며 고호와 모네처럼 숙련된 표현의 달인에 의해 각자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 각자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르게 채색될 수 있듯이 작가는 그만의 붓과 그만의 스타일을 사용해 존재를 표현합니다. 이번에 그가 사용하는 붓은 '더 초’입니다.